내 마음의 깊은 산골
아침도 해 비치지 않는 파란 어둠 속에는
뼈마다 아슬한 무엇을 쪼아내는
은밀한 소리가 있다
숨이 흘러가는 사이
그 사이로 간간이 울리는 소리에 젖어
마음은 눈 감고 머리를 풀어드린다
보이지 않는 높이에서
내 몸의 가엾은 부분들이
발간 분(粉)처럼 떨어져갈 때에는
아, 깊은 산골의 어디메서
강한 연기가 가득차 밀리고
연연(年年) 아픔 없이 찍힌 내가
혼자 취하여 잠이 든다
새는 날아가고 밤은 더욱 맑아오는데
달빛 어리는 내 가슴 위에는
파란 상화(傷花)가 꿈처럼 피어 있다.
불꽃을 흘리며 온다
나의 걸음은 핏빛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끝내 동결된 나의 집은
어찌하여 나의 어디메에도
보이지 않는가
가느다란 음성과
그 소리하는 자유를 허락할 것인가
아로새긴 눈과 눈의 이슬만을
나는 믿어도 좋은가
바람비 속에서도
아름다운 수회(繡繪)의 그림자 속에서도
우리는 어찌하여
가는 약속을 어기지 못할까
불꽃을 흘리며
별 없는 지평선 가로
또 다시 너의 모두가 사라지는 동안
내 동결(凍結)에도 달빛이 왔으면
파아란 파아란 달빛이 왔으면
낙엽을 밟으면
슬픔이 묻어 일어난다
목소리 지쳐 우는 하늘과
기울어진 산그림자에
마지막 노을이 불타는 저녁
연연히 떠가는 물 위에
모자를 벗어 들고
사랑의 하직을 다 바쳐도
내가 우는구나
시월을 한(恨)하여
내가 울며 서겠노라.
오늘 한 대의 마차가
하늘로 가오
돌아보아도 빈 얼굴
당신은
추운 눈물을 흘리시는 구려
저기 서 있는 나무들은
모두 언 그림자요
내가 모르는 신이요
당신이
벙어리처럼 또 웃으시는구려
구름 속으로
비단에 젖은
한 대의 마차는 가오.
-여백의 존재성
나는 보노라, 지금에 없는 것을
나는 아노라, 일찍이 없는 것을
나는 만드노라, 또 있어지는 것을
이리하여 나는 그들이 배제한 것을 그들이 부르는 것을 그들과 동일한 것을 어찌합니까. 그 때 여백은 그들의 영원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여백이란 부재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되므로입니다.
L여! 이 젖어내리는 얼굴을 누구에게도 나는 보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월식과 로댕의 면과 릴케의 전진은... 내가 분명히 말할 것 같으면서도 뜻 되지 않는 이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나와 그리고 당신이 달려가는 이 공간의 전면에 보면 볼수록 익어오는 소리와 같은 저 위대한 물결을 우리는 어떻게 전하여야 할 것입니까 저 물상의 주변에서 주변과 주변의 교착에서 불가시로 인식되는 여백의 진동을 나는 정녕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반한 혈전의 모습이올시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아득한 지대일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내가 보지 못한 그리고 느끼지 못한 모든 것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동양의 하늘에 뼈저리게 낡아오는 우리들 크나큰 고민도 결국은 이 아득한 지대에서 그대로 혼미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극』, 1954, 1, 20
-지평선의 전달
지금에 있는 나는 나의 지평선을 위하여 중간자의 고민을 미래성과 과거성에 대하여 또는 전면의 신과 배면의 신의 새로운 발각에 대한 고민으로 이끌었다. 배면의 신이란 특수한 신이다. 부활하지 못하는 신학적 표준에선 언제나 박제당한 신이다. 과거의 신이다. 눈에 가득찬 흑사를 어쩌지 못하는 모든 우리들의 추상이며 돌아선 채 우리와 함께 살았던 신이다. 부재의 신, 부정의 신 마침내 신이라고 불리우지 못하는 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지시하지 않고 어디서 왔는가를 지시하는 신, 빈 신이 현대에는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중략-
나는 대답한다. 나는 나의 밑 깊은 부재에서 떠오는 것이다. 저 한없는 시공에서 일어서는 것은, 천만 나래를 털며 세계의 무풍지대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은 .... 아아 나의 투시는 저 운속(雲速)하는 엘시뇌성곽의 자정으로 다시 초혼하는 무주공산으로 거기 지평선의 전달을 귀담아 쫓는다. 현대시는 바야흐로 그의 매개가 어떤 것인가를 성책(省責)할 일이다. 권위와 신앙, 보다 더 나의 승리로서의 질서를...
『신작품』 8집, 1954, 11
-현대시와 비유
짐짓 존재하는 모두는 비유에 불과하다(벨트람, 「괴에테론」)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의 시작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현대란 시의 메타포아 속에 압축되며 존재가 메타몰포오즈하는 전장이며, 다시 정신의 메타피직한 초월의 시대라는 것을 어찌 부인할까.
상상과 의미와 상상과 그리고 또 신화의 곁에서 비유는 실존의 기를 세우는 언어의 재건이 되라. 눈감은 방법의 직인이여! 다시 비유의 직인이여! 꽃이며 나무며 인정이며 하는 전율의 살창에서 시방 그대의 소리 없는 울음을 느껴라. 그러나 “그것은 정신일 것이다.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정신일 것이다. 우리가 타일러도 묵묵하는, 아니 들리는 것이란 벌써 인간의 말소리가 아니다. 그는 우리들의 종이 아니라 주인일 것이다”(브랫드리, 『시를 위한 시』)
『시연구』 제1집, 1956. 5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0년에서 45년에 걸친 우리 문학의 가장 암흑기에 마련된 것이다. 전 50여 편의 유고시는 거의 표백적인 인간 상태와 무잡(無雜)한 상실을 비쳐내던 말세적 공백에 있어서 불후한 명맥을 감당하는 유일한 정신군(精神群)이었다. 두려움을 청신하기 위한 내면의식과 이메이지의 이채로운 확산, 그리고 심미적 응결과 우주에의 영원한 손짓은 그의 28년 생애를 지지한 실존이었으며 겨레의 피비린 반기에 묻힌 대로 그 암살된 시간 위에 종식하는 날까지 그의 정신의 극지로 말없이 옮아가며 불붙는 사명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재자에 대한 위협이 암흑적 영역으로 문을 열었을 때, 거기서 윤동주는 무한 행렬의 한 사람이 되어 지변(地邊)도 변화도 없는 거리를 눈과 입과 귀를 막고 그대로 걸었다. 영원의 해결이란 절대의 소산이란 이미 부정 이전에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
누가 그에게 아름다운 잔을 바쳤으며 비정의 합창을 그에게 불러 준 것인가.
『초극』, 1953, 9, 16
-시인의 역설
초봄에 발을 들였던 이 정원에서 오늘 나는 몇 그루 꽃나무들의 싱싱한 성장을 보고 있다. 잎과 잎이 서로 다 지르는 잎 소리며 꽃가루가 날리는 뽀얀 풍매에 싸여 나의 미소는 엷디엷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거름이 되고 저들의 밑바탕이 되었던 토양의 빛깔을 수유라도 잊어버릴 수 없다. 그새 내가 캐어 본 자국마다엔 어둡고 까칠한 흙밥들이 뭉개져 있어 사뭇 지난날 불모의 쓰라린 기억을 더듬게 하였으니 지금 화창한 꽃나무들이 무심코 내려 보는 저마다의 발뿌리는 어떠한지? 나의 생각은 거기로만 잇닿인다.
꽃나무와 토양과의 혈연은 곧 시와 시적 상황과의 혈연으로 보아지니 우리는 두 가지의 어느 하나에도 감감해선 아니 된 것이며 그 혈연을 바로 잡고 그 혈연에의 장애란 장애는 모두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나는 몇 가지 주제가 이끄는 대로 김소월, 이육사, 이상 그리고 윤동주에 이르는 네 그루 꽃나무의 밑뿌리를 나대로이나마 뒤져 본 셈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불우한 이들 1920년대로부터 40년대 전반에 걸친 우리의 시적 상황을 온전히 대변하였다곤 우기지 않으련다. 사정에 따라 흘러보낸 몇 사람과 또 장차 다른 각도에서 살펴 넣을 몇 사람들을 이에 포함시키지 못했음은 매우 유감되나, 네 그루 꽃나무는 네 그루 꽃나무대로 저들이 뿌리했던 토양과의 혈연을 참혹하게 저지르고 말았다는 부정적 의미에서만이라도, 이 작업은 무사(誣斯)가 아니었다는 것을 다짐하고 싶다. 이제 많은 시정객(是正客)들이 어슬하지만 내일이 바라뵈는 이 정원에 가득히 모여 오길 바라면서 나는 한가의 사립짝을 나서기로 한다.
《문학예술》 1957년, 4월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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