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취지 

 

고석규 비평 문학관의 설립취지

  고석규 비평가는 1932년 9월 7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고원식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때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했다. 부산대학 재학 시절 동인활동을 활발하게 펼쳐『신작품』,『시조』,『시연구』,『부산문학』등을 펴냈다. 
 
1954년에는 김재섭과 함께 2인 공저『초극』을 출간했으며, 여기에 윤동주 연구사로서는 최초의 본격 윤동주론인「윤동주의 정신적 소묘」(『초극』, 1953, 9)를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문단의 중심매체였던《문학예술》(1957년 2월호부터 8월호까지)에「시인의 역설」을 연재함으로써 문학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 살별처럼 나타난 비평가였다.

 이후 그가 쏟아낸 평문들은 1950년대의 한국동란 이후 실존적 상황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문학적 글쓰기로 승화시켰다. 살별이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며 사라지듯이 고석규 비평가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산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에 위촉되고 두 주의 강의를 마친 1958년 4월 19일 심장마비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유고 「시적 상상력」은 1958년《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그런 이후 그의 문학적 행로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30년이 훨씬 지난 1980년대 후반 부산지역에서 비평공부를 시작한 일군의 젊은 비평세대인 < 오늘의 문예비평 > 동인들의 발굴 작업으로 고석규 비평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의 절친이었던 전 부산대 영문학과 홍기종 교수가 보관해오던 누렇게 변색된 고석규의 원고뭉치를 토대로 고석규 비평가의 원고들을 정리하여, 1990년에 고석규의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을 펴내었다. 
 
 이후 다시 발굴된 시, 일기, 번역 등의 원고를 정리해서 고석규 전집을 펴내었다. 전집 발간 이후 고석규 비평가는 1950년대 한국비평사에서는 뺄 수 없는 중요한 비평가로 평가되었다. 오직 글을 읽고 쓰기에만 모든 시간을 보냈던 그의 문학적 열정은 지금 이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빼어난 문학 연구가요 문학 비평가였다.

 그러므로 고석규 비평가의 문학 정신을 되새기며 기리는 일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하나의 중요한 과제이다. 현재의 한국문학은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여건도 좋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문학적 진정성과 문학인의 장인정신은 갈수록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고석규를 기억하고 그의 문학 정신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석규 비평문학관을 개관하여 한국문학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창조적 공간을 마련해 나가고자 한다. 특히 지역 문화진흥 시대를 맞아 이 문학관이 지역문학 활성화의 기지 역할을 감당하면서, 나아가 동남 문화권을 형성하는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고석규 비평가의 정신을 현재화하고자 한다.
< 문학관 순례 > 고석규비평문학관

지난 2021년 김해 삼방동에 터를 잡은 고석규비평문학관은 1950년 한국비평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한 사람 고석규 비평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당시 한국 평단의 한 맥을 형성해왔던 유종호, 이어령과는 달리 스물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오랜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그런 그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후반 부산지역에서 비평공부를 시작한 일군의 젊은 비평가들 덕분이었다. 
『오늘의 문예비평』을 만든 주역들인 이들은 고석규의 친구이자 부산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낸 홍기종 선생이 보관해온 고석규의 원고를 토대로 1990년 유고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을 펴낸다. 이후 다시 발굴된 고석규의 시와 일기, 번역 등의 원고를 정리해서 고석규 전집을 펴내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고석규는 1950년대 한국비평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비평가로 재평가되었다.

 고석규가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한 1952년 이후 1958년 요절하기까지 6-7년에 해당하는 짧은 기간이 그의 문학활동 시기의 전부임을 고려한다면, 그가 쏟아낸 작품들과 문학적 열정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당시 그가 소장했던 4천여 권의 장서들마저 세월의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소실되었다. 결과적으로 고석규를 기리는 문학관에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의 유품과 몇몇 원고 그리고 유고집만이 남아있다. 이런 이유로 기성의 문학관과는 달리 고석규비평문학관은 출발부터 취약한 자료만으로 문학관을 일궈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게다가 고석규가 북한 함흥 출신인 탓에 지역 연고도 불분명한 김해에 문학관이 들어서면서 처음부터 곱지 않은 시선들이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석규의 문학적 이력과 생애를 돌이켜본다면 그의 불꽃같은 삶과 비평가로서의 궤적은 전후 1950년대 한국문학비평의 자장 안에서 고석규라는 비평가의 존재감을 내비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평가로서 그가 새롭게 추동해낸 비평의 흔적에 대해 달리 이견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고석규비평문학관은 고석규의 짧고 굴곡진 삶을 조명하면서 그의 비평정신의 전모를 온전히 되살려내어야 하는 시대적 책무를 부여받고 있다.
< 고석규 아카이빙 >

 1952년 부산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 활발하게 동인활동을 시작한 고석규는 연이어 『신작품』, 『시조』, 『시연구』, 『부산문학』 등을 펴낸다. 1954년에는 김재섭과 함께 공저 『초극』을 출간했으며, 여기에 윤동주 연구사로서는 최초의 본격 윤동주론인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초극』, 1953, 9)를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문단의 중심매체였던 《문학예술》 (1957년 2월호부터 8월호까지)에 「시인의 역설」을 연재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말 그대로 전후 50년대 살별처럼 나타난 비평가였다.

 이후 고석규가 쏟아낸 평문들은 1950년대의 실존적 상황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비평적 글쓰기의 원형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하늘이 그의 천재적인 글재주를 시샘이라도 하듯 대학원을 졸업, 부산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에 위촉되어 겨우 두 주의 강의를 마친 1958년 4월 19일, 26세의 젊은 고석규는 심장마비로 하늘의 별이 된다. 그가 남긴 유고 「시적 상상력」은 같은 해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고석규의 평론들은 50년대 문학이 비교적 최근에 연구대상이 되었으며, 자신의 비평적 사유를 펼쳐내기도 전에 요절했다는 사실로 인해 거의 주목받지 못했었다. 따라서 이전까지 고석규의 비평세계는 그와 가까웠던 몇몇 인물들의 증언이나 회고를 통해 일부만 조명되는 수준이었다. 고석규 비평의 문학사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작고한 서울대 김윤식 교수에 의해서였다. 그의 네 편에 달하는 고석규 비평에 관한 메타비평은 살아생전 고석규가 천착했던 릴케의 사상과 미학, 세대를 초월한 고석규와 윤동주의 정신적 교류, 전후 한국의 근대적 합리주의 문학의 계보랄 수 있는 이어령의 초기비평(저항의 문학)과 유종호의 비평(토착민 의식)과는 분명하게 변별되는 고석규의 실존적 비평의 원류를 밝혀낸 수작(秀作)이다.

 김윤식 교수의 고석규 연구는 고석규 비평을 실존적 존재론의 계보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실존주의 비평의 연구를 본격화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가족을 등지고 혼자 남하한 고석규가 극적으로 아버지와 상봉한 후 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부산대 국문학과(1952년)에 진학하는 것을 계기로 그의 왕성한 동인지 활동은 시작되었다. 『신작품』을 시작으로 『시조』(1953), 『부대문학』, 『시연구』(1956) 등의 동인지 활동과 김재섭과 2인 동인지 형식으로 발행한 『초극』, 부산대신문, 국제신문, 부산일보 등에 발표한 「문학현실제고」, 「문학적 아이로니」, 「문학과 문학하는 일」 등의 단편적인 글도 눈부시다. 「지평선의 전달」(1954.11), 「현대시의 전개」(1956.5) 등의 문학론은 『신작품』, 『시연구』 등의 동인지에 실리면서 고석규만의 비평체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p.풀끼에의 『실존주의』를 번역할 정도로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T.S 엘리어트의 인간적 경위」, 「탐색적 인간주의자」 등과 같은 문학에 관련된 외국잡지 기사들도 번역, 소개하였다.

 고석규가 실존했던 전후 1950년대의 비평세대는 전쟁 체험을 통하여 죽음, 불안, 공포 등의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주제들을 자신들의 문학 속에서 다루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석규 비평’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을 자신의 비평 속에서 직접 보여주고 있지는 않으나 사랑이라는 개념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문제의식과 죽음 자체로의 지향이 바로 사회적 성격을 띄는 것이었다. 고석규 비평의 이런 경향성은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해있다.
< 고석규비평문학관, 모두가 기록자이고 비평가인 공간 >
 
문학을 통해 인간이 향유하는 것은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 존재했던 감각이다. 문학자료가 공동체의 기억과 정신이 새겨진 기록물이라는 입장에 동의한다면 고석규비평문학관이 품어야 하는 시공간의 감각은 우선 ‘폐허라는 상징이 띄는 공간성과 시간성’일 것이다. 비평가 김윤식이 명명했던 ‘끝의 끝’, ‘막다른 끝’, ‘허무의 공간’, ‘최후의 점’으로서의 피난처 부산이 생전의 고석규에게 단순한 지명의 의미였을 리는 없다. 그것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환각을, 형이상학을 꿈꿀 수 밖에 없었던 고석규의 시간과 공간의 고유명사였을 것이다. 「돌의 사상」, 「해바라기와 인간병」, 「여백의 존재성」, 「서정주 언어서설」,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등 고석규의 유려한 산문 5편엔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50년대의 이러한 감수성이 고석규가 쌓아올린 ‘형이상학의 성채’ 만큼 신비스런 빛을 발하고 있다.

소실될 처지에 놓였던 비평자료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었던 천재 비평가는 두 비평가에 의해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창조적인 기록설계자, 아키비스트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다한 김윤식이라는 탁월한 비평가와 그의 비평작업을 계승하면서 지역문학과 문화에 깊이 천착해있던 또 다른 비평가 남송우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고석규와 함께 자신들이 세상에 내어놓은 기억과 기록으로 고석규비평문학관 자료실의 한 벽면을 채우게 될 것이다. “고석규가 막다른 현실 속에서 이룩한 마지막 역설”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에겐 고석규가 추구했던 비평정신을 구체화시킬 언어와 실질적인 변화의 방도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기존 세계에 대한 비평적 사유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담론을 만들어 내는 비평 플랫폼’, 그것이 비록 당장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일지라도 고석규비평문학관에 머무르는 이들 모두가 기록자이자 비평가이기를 꿈꿔본다. “비평은 단순히 윤리적 직관에 의지하는, 올바른 글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윤리적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세상을 폭로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루카치가 말한 비평가의 운명적 순간이길. 우리는 여전히 고석규라는 진실에 ‘아직은’ 가닿지 못했다.

개관 일시 

월요일 ~ 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고석규 비평문학관 위치한 곳

경남 김해시 활천로294 (은석문화회관 B1층)
TEL_055.312.6459      FAX_055.312.6450

고석규 비평문학관 부산사무소

 부산 동래구 온천장로 125번길 69
 TEL_051.758.3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