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석규 아카이빙 >
1952년 부산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 활발하게 동인활동을 시작한 고석규는 연이어 『신작품』, 『시조』, 『시연구』, 『부산문학』 등을 펴낸다. 1954년에는 김재섭과 함께 공저 『초극』을 출간했으며, 여기에 윤동주 연구사로서는 최초의 본격 윤동주론인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초극』, 1953, 9)를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문단의 중심매체였던 《문학예술》 (1957년 2월호부터 8월호까지)에 「시인의 역설」을 연재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비평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말 그대로 전후 50년대 살별처럼 나타난 비평가였다.
이후 고석규가 쏟아낸 평문들은 1950년대의 실존적 상황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비평적 글쓰기의 원형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하늘이 그의 천재적인 글재주를 시샘이라도 하듯 대학원을 졸업, 부산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에 위촉되어 겨우 두 주의 강의를 마친 1958년 4월 19일, 26세의 젊은 고석규는 심장마비로 하늘의 별이 된다. 그가 남긴 유고 「시적 상상력」은 같은 해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다.
고석규의 평론들은 50년대 문학이 비교적 최근에 연구대상이 되었으며, 자신의 비평적 사유를 펼쳐내기도 전에 요절했다는 사실로 인해 거의 주목받지 못했었다. 따라서 이전까지 고석규의 비평세계는 그와 가까웠던 몇몇 인물들의 증언이나 회고를 통해 일부만 조명되는 수준이었다. 고석규 비평의 문학사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작고한 서울대 김윤식 교수에 의해서였다. 그의 네 편에 달하는 고석규 비평에 관한 메타비평은 살아생전 고석규가 천착했던 릴케의 사상과 미학, 세대를 초월한 고석규와 윤동주의 정신적 교류, 전후 한국의 근대적 합리주의 문학의 계보랄 수 있는 이어령의 초기비평(저항의 문학)과 유종호의 비평(토착민 의식)과는 분명하게 변별되는 고석규의 실존적 비평의 원류를 밝혀낸 수작(秀作)이다.
김윤식 교수의 고석규 연구는 고석규 비평을 실존적 존재론의 계보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실존주의 비평의 연구를 본격화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가족을 등지고 혼자 남하한 고석규가 극적으로 아버지와 상봉한 후 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부산대 국문학과(1952년)에 진학하는 것을 계기로 그의 왕성한 동인지 활동은 시작되었다. 『신작품』을 시작으로 『시조』(1953), 『부대문학』, 『시연구』(1956) 등의 동인지 활동과 김재섭과 2인 동인지 형식으로 발행한 『초극』, 부산대신문, 국제신문, 부산일보 등에 발표한 「문학현실제고」, 「문학적 아이로니」, 「문학과 문학하는 일」 등의 단편적인 글도 눈부시다. 「지평선의 전달」(1954.11), 「현대시의 전개」(1956.5) 등의 문학론은 『신작품』, 『시연구』 등의 동인지에 실리면서 고석규만의 비평체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p.풀끼에의 『실존주의』를 번역할 정도로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T.S 엘리어트의 인간적 경위」, 「탐색적 인간주의자」 등과 같은 문학에 관련된 외국잡지 기사들도 번역, 소개하였다.
고석규가 실존했던 전후 1950년대의 비평세대는 전쟁 체험을 통하여 죽음, 불안, 공포 등의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주제들을 자신들의 문학 속에서 다루고 그것을 해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석규 비평’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을 자신의 비평 속에서 직접 보여주고 있지는 않으나 사랑이라는 개념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문제의식과 죽음 자체로의 지향이 바로 사회적 성격을 띄는 것이었다. 고석규 비평의 이런 경향성은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