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내가 미덥게 생각한 것은 고 군의 외국어에 대한 실력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기와 노력은 얼마 안 가서 영불의 책을 쉬 읽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은근히, 고군을 대학에 남겨두고 싶은 욕심을 품었다. 재학시에 번역해 낸, p·포울께의 『실존주의』는 요즘 국문과 학생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대학원에 들어서부터 시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시학과 평론을 위한 학구생활에만 열중하였다. 「시인의 역설」과 「시적 상상력」은 모두 그 무렵의 역작이다. 후자를 주논문으로 해서 그는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장래의 대학교수로서 모교에 남게 되었으나, 시국의 불행은 그를 27세로써 요절시키고 말았다. 그의 평론에 대해서는 아직 미완성이라 하겠으나, 한국시단을 위한 값있는 시사가 많으리라고 믿는다.'
'『초극』을 낸 2·3년 후 그와 한 하숙에서 얼마 동안을 기거를 같이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부터 그는 평론의 문체와 평론의 방법에 대한 제 회의를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회의가 어느 정도 가시어지고, 새로운 자세를 하고 나타난 것이 『시연구』지 제1집에 실린 「비유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현대시의 전개」였다. 이것이 그의 젊은 평론활동에 있어서 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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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지에 연재된 「시인의 역설」은 그로서는 역작이자 그의 연재의 숙제였던 시의 심리학적 문체론적 또는 존재론적 제면이 해부 검토되었다. 《현대문학》지에 연재된 「시적 상상력」에서도 시의 심리학적 존재론적 파악에 깊이 관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워낙 거창한 방법론을 세웠기 때문에 평론가 고석규는 제 나이로서는 무리한 시도로서 끝마친 감이 없지도 않으나, 만약 그가 더 장수하여 노력하였다고 하면, 참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적에 그의 죽음은 애석하기 한이 없다. 미완의 시론에 그쳤다 하더라도 그가 뜻한 바 안목은 금후의 한국평론에 많은 시사가 될 것이다. 한국 평론계는 한 시림의 진지한 아카데미상을 잃은 셈이다.'
< 청동시대 >야말로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로댕의 시도이자 기념비였던 것, 고석규가 로댕의 사물 만들기의 비결에 대한 릴케의 해석에 얼마나 당황하고 또 놀라워했는가는 『초극』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청동의 계절’이라는 제목 아래 5편의 산문을 실었던 것, 로댕•릴케의 ‘청동시대’가 임시수도 항도 부산 구덕산의 판자로 지은 대학촌의 학생 고석규로 하여금 ‘청동의 계절’을 인식케 만들었다.
임시수도 부산이 바로 ‘청동의 계절’이라는 이 인식이야말로 전후문학의 원점이 아닐 것인가. 그것은 태고를 의미하며, 최초의 인간의 탄생을 뜻하며, 그 최초의 인간이 최초의 물건 만들기의 장소이자 계절이었던 것, 고석규 그는 그러한 최초의 인간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 자각의 표정은 도처에서 드러나며 ‘청동의 계절스러움’으로 충만해 있다. 《외국문학》, 1992년 가을호
지금까지 논의된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돌의 사상」, 「해바라기 인간병」, 「여백의 존재성」은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으로는 역설성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에 표백된 어둠을 통해 빛으로(죽음에서 부활로), 무생명체에서 생명을, 비존재성에서 존재성으로의 역설정신은 「시인의 역설」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극』에 나타난 고석규의 존재에 대한 역설적 해명과 역설적 삶의 지향은 「시인의 역설」이 있게 한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문예비평》, 1993년 가을호
1950년대 고석규 비평의 근대성 연구 - 하상일
고석규 문학은 1950년대 한국문학의 정신사적 흐름을 읽어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문학적 이력을 통해 5권 분량의 문학전집을 묶어낼 수 있을 만큼, 그의 문학 활동은 왕성했고 문학적 역량 또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우리 현대문학사의 지형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항간의 말들은 결코 과장된 발언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그의 문학은 저 신산했던 50년대가 저물면서 끝이 났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과 정신은 계속적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야 그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모색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잊혀진 문학사의 발굴이라는 새로움에 대한 의의보다는 현대문학사의 근본정신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 세계는 바로 1950년대 한국문학의 정신사적 궤적을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뚜렷한 지표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9)
실존적 기획의 존재론적 지평과 에세이적 비평 - 강경화
고석규에 따르면 문학 현실은 전에는 존재치 않은 그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이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현실에의 교량은 자기조건의 실천 다시 말하면 보이는 현실의 부정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하는 구절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문학 현실이란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의 변용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석규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세계와의 변증법을 통해 새로운 초월의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석규는 ‘선’이 현실에 머물도록 종용하는데 반해 ‘미’란 그 자체가 현실을 떠나 현실의 여백으로 나가도록 재촉하는 함정과 같다는 사르트르의 인식, 곧 상상적 창조란 본질적으로 ‘세계에 의하여 둘려진’ 의식을 떠난 현실 이외의 여백에 이해서만 가능하다는 통찰을 놀라운 발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창조적 상상럭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가 언어, 의미, 존재, 상징, 비유, 상상력과 같은 새로운 차원의 상태와 의미를 창조하는 ‘상상적 구성물의 세계’ 곧 문학의 세계로 투신함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석규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적 탐구는 전쟁의 내면적화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으며, 존재론자로서 ‘존재’하려는 근원적 욕망이 그 인식론적인 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성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석규 비평은 이제 본격적인 문학의 영역으로 이동하며, 여기서 구체적인 비평적 발언들을 수행하게 된다. (『한국문학비평의 인식과 담론의 실현화 연구』, 태학사, 1999)
전후문학과 고석규 비평-임영봉
시론이 중심에 놓인 고석규의 문학론은 상당 부분 신비평의 논리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있지만, 실존주의적 색채가 더욱 지배적이다. 이 점은 모더니즘이 경이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던 당대의 상황에서 그것을 세계관의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을 이끌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전후의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 모더니즘을 넘어서는 전망까지 보여주고자 했다. 이와 같은 점에서 고석규는 전위적인 모더니스트인 동시에 그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비평은 자기 세대의 운명에서 비롯된 산문정신과 위기의식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1950년대 문학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돌연한 죽음과 문학의 중단은 매우 상징적인 것인데 그것은 50년대 문학의 성격과 그 한계를 한층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한국현대문학비평사론』, 역락, 2000)
고석규의 비평과 수사학 - 이미순
고석규의 수사학 논의에서 중심적인 것은 비유론과 역설, 아이러니론이었다. 그는 시어의 특수성은 비유에 있다고 보았는데, 「현대시의 비유」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였다. 고석규의 비유론에서 특이한 것은 은유를 직관과 관련시킨 점과 대상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으로 상징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비유에 대한 원론적인 고찰에 이어 고석규는 우리 시사에 나타난 비유의 양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가 비유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윤곤강, 김기림, 정지용, 서정주, 조지훈과 1950년대의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와 시론이었다. 이 논의에서 고석규는 서정주 시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은 서정주의 시가 가지는 직관의 힘, 은유에 연유하였다.
고석규의 비평에서 수사학은 시인의 정신작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은유를 직유와 구별하면서도 은유가 가지는 직관의 작용에 유의하였다. 「시인의 역설」에서의 역설은 어디까지나 역설의 가능성으로서, 역설정신에 해당하였다. 알레고리는 비평정신으로, 아이러니는 절대적 부정성으로 파악되었다. 고석규의 수사학은 은유와 상징 중심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주지적 전통주의를 지향하는 그의 미학과 긴밀하게 대응하였다. (『한국현대문학비평과 수사학』, 월인, 2000)
폐허 위의 불꽃 –고석규의 「윤동주의 정신적 소묘」 - 이숭원
고석규는 「또 다른 고향」을 인용하며 윤동주에 대한 조사 형식으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런 준비도 체계도 갖추지 않고 암흑의 시대에 무한한 내전을 감행했던 윤동주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윤동주의 피묻은 고뇌가 불멸의 신전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끝을 맺었다. 윤동주는 그의 말대로 한국시사의 아름다운 상징으로 되살아나 불멸의 전당에 자리 잡았다. 스물둘의 나이에 스물여덟에 죽은 윤동주를 애도했던 고석규는 그로부터 5년 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또한 운명에 속하는 일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시, 비평을 만나다』, 태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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